연재소설 《빵 굽는 아저씨》도시와 아버지

CHAPTER 11

도시와 아버지

한 번에 펼쳐 읽기

도시와 아버지

사실 나는 너무 어려서 아버지의 시골 생활을 알지 못한다.

어릴적 나는 호기심이 많은 아이였고 그 호기심이 여기 저기서 문제를 만들었다.

겨우 심어 놓은 못자리에 들어가서 개구리를 잡는다던지

미역깡에 들어가서 이러 저리 다니다가 다리에 거머리를 한 가득 붙이고 다닌다 던지

뭐 그런 정도의 시골 생활이 기억날뿐

어른들의 생활이란 알 수가 없다.

아버지가 도박으로 어머니와 크게 다투신건 기억이 난다.

그후로

우리는 대구의 작은 외삼촌이 방적공장으로 크게 성공을 하시자

우리도 고향을 정리하여 그 돈으로 방적기계 몇대를 사고 외삼촌의 방적공장에 합류한 걸 기억한다.

그 때쯤인가 부터 아버지와 작은 외삼촌과의 사이가 멀어지신것 같다.

애초에 아버지는 도시라는 곳에 맞는 사람이 아니었다.

시골 논에서 개구리를 잡던 어린 시절

물론 도시에 맞는 사람이라는 것도 존재하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는 도시와는 상극에 가까운 분이시다.

어머니는 한번 떠난 시골로 다시 돌아가실 생각이 없으셨나 보시다.

아버지는 하는 일마다 문제 투성이었다.

외삼촌은 아버지가 운전을 배워서 가까운 공단에 납품을 하셨으면 하신것 같다.

그때 외삼촌의 공장터는 넓이를 가늠할 수 없을 만큼 넓었고 그 중간에는 큰 물웅덩이가 있었다.

그 넓은 공장터 한쪽에 공장이 있었지만 공장 또한 작은 크기가 아니었다는 것을 기억한다.

그 넓은 땅에서 외삼촌은 공장명의의 작은 트럭을 사고 운전연습을 할 수 있게 길을 열었다.

하지만 허사였다.

아버지는 그차를 물 웅덩이에 빠트리고는 어디로 사라지셨다.

뒷 수습은 늘 다른 사람의 몫이 었다.

공장 마당의 물웅덩이에 빠진 작은 트럭

그쯤해서 아버지와 외삼촌의 갈등이 생겼다.

삼교대 밤시간에 불량률이 많았고

아버지의 약한 마음에 여공들이 조는 것에 제동을 가하지 못했다.

결국 일은 틀어져서 아버지는 외삼촌과 등을 졌다.

외삼촌의 사업은 문제가 발생했고 덩그란 땅에 어머니 명의의 방적기 몇대만 남고 모두 채권자들 손에 넘어 갔다.

수 년뒤 외삼촌은 지병이신 간경화로 세상을 떠나셨다.

사실 누구의 잘 잘못이라고 보기는 어렵지만

아버지가 전혀 문제가 없었다고 보기도 어렵다.

생각해 보면 그때의 아버지는 지금의 나보다도 어리다.

나이가 어리다고 세상의 혜안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인생의 경험이란 그런 하나 하나의 잘못으로부터 무언가를 얻어서 나아가는 것이기에

그때의 아버지는 어리고 어린 나이였다.

아버지와 나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아버지는 고향으로 가셔서 농사를 하시겠다고 하셨다.

사실 아버지에게 도시생활은 버거움의 연속이었다.

어머니와 외삼촌들의 권유로 도시로 나오기는 하셨지만 시골에 마춰진 삶을 도시로 마추는 것은 쉽지 않았다.

그런 도시생활은 언제나 어버지에게는 무게의 연속이자 벽이었다.

또한 어머니가 모든것을 책임진 생활고를 자신이 짊어지는 것은 절박한 현실이기도 했다.

첫 농사는 아버지가 가장 자신있어 하시던 수박농사 였다.

늘 삶은 모든 것이 호락호락하지 하지 않다.

시련은 언제나 삶은 모퉁이에 보란듯 있어 왔다.

그 해 수박에는 잎마름병이 돌았다.

보통은 농사를 접고 바로 다른 걸 시작했겠지만 아버지에게는 그런 여력 따위가 있을 리 없다.

그때 마침 나는 군대를 마치고 복학을 앞둔 시기라 시간이 좀 있었다.

병든 수박 줄기에 약을 바르는 아버지와 아들

당장 시골의 수박밭으로 갔다.

잎마름병에는 방법이 없었다.

약을 미술붓으로 발라서 물이 열매까지 잘 전달하게 하고 기다리는 방법밖에는.

잎마름병으로 수박은 줄기와 잎이 갈라지고 있었다.

하루라도 늦어지면 넓은 수박밭 전부를 잃을 때다.

정신없이 붓으로 약을 바르다 옆의 밭을 보게 되었다.

의문이 들었다.

사흘을 피죽도 못 먹은 사람같이 숨을 허덕이는 우리밭과는 달리 옆의 밭은 싱싱한 푸른 빛이 검푸르게 빛나고 있었다.

옆밭은 계약농의 밭이었다.

아버지 말씀이 물을 많이 주고 약을 쳐서 이쁘게 보이려고 그런거라고 하신다.

아버지의 말씀에는 진심이 보였다.

그랬다. 아버지는 수박에 진심이었다.

살면서 아버지의 그런 모습을 처음 보았다.

장맛비 속에서 수박을 팔러 다니는 아버지

아버지는 늘 끝까지 하시는 일이 없고 사고치고 깽판치고 어딘가로 숨으면 어머니가 뒤정리를 하셨다.

그해는 운이 좋지 않았다.

몇년만의 장마에 출하시기를 맞출 수 없었고 할 수 없이 아버지는 수박을 실고 전국을 돌면서 수박을 파셨지만 역부족이었다.

수년만의 장마로 겨우 살린 수박값이 형편이 없다.

아버지는 직접 차를 몰고 이리로 저리로 다니며 수박을 팔았고

아버지의 첫 농사는 본전도 보지 못했다.

그렇게 아버지의 첫 농사는 습쓸하게 접어야 했다.

그해는 유독 비가 많이 왔다.

하지만 어머니의 죽음으로 아버지는 많은 부분이 바뀌셨다.

중간에 포기할만도 하신데 이번에는 예전과 달랐다.

이미 나는 잎마름병이 왔을때 아버지의 진심을 알았다.

하지만 삶은 그런 진심따위로 우리를 평가하지 않는다.

애초에 우리를 평가하지도 않는다.

삶은 냉혹했다.

지독한 5월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아버지는 10년을 치매와 파킨슨증으로 고생을 하셨다. 처음 요양원에 입원하시고 굉장한 차도를 보이셔서 다시 퇴원하시는 줄 알았다. 하지만 그건 작은 희망에 불과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코로나가 찾아왔다.

면회는 중단되고 서로가 만날 수 없는 시간이 길어졌다.

그전에 아버지는 요양원에서 낙상을 하셨다.

낙상 후 기억력과 인지력이 극도로 나빠지셨다.

4월의 어느 날 직장에서 일을 하는 중 전화가 걸려왔다.

아버지가 요양 보호사가 안 보시는 사이에 죽을 드시다 사래가 걸렸다고 한다.

처음에는 가벼운 증상이려니 했다.

산소 포화도도 90 중반이지만 나쁘지 않은 수치이고 별다른 증상이 없었지만 요양원의 상근직 간호사의 의견은 달랐다.

노인들은 이런 사소한 일에도 돌아가시는 경우가 많으니 큰 병원으로 가시라는 것이다.

동생과 나는 바로 시간을 낼 수 없었다.

하루가 지나고 다시 전화가 왔다.

아버지가 열이 나고 가벼운 폐렴 증상을 보인다는 것이다.

동생이 휴가를 내고 요양원으로 가려니 시간상 당장 갈 수 있는 시간이 안되었다.

할 수 없이 다시 하루를 보내고 그다음 날 아침에 동생집 근처에 이대 서울 의료원에 입원을 했다.

병실에서 눈빛으로 아들들을 알아본 아버지

그 사이 상태는 많이 심각해져 있었다.

간밤에 고비를 넘기고 아버지는 나와 동생을 알아보시는 눈치다.

말씀을 못하시진 지는 이미 오래다.

그냥 눈빛으로 서로의 마음을 보는 정도다.

첫 주는 동생이 간병을 했지만 회사를 다니는 몸이라 쉽지 않았다.

코로나로 간병인을 구하기도 간병을 하는 것도 모든 것이 힘들게 되었다.

병실에서는 1인 이상 상주 할 수 없게 규칙이 만들어지고 코로나 확인증이 없으면

간병도 불가능했다. 한번 나갔다 24시간이 지나 다시 들어오면 다시 코로나 확인을 받아야 한다.

그 사이 무료로 써주던 전문의 확인증은 3만 원이 되었다.

나는 프로젝트 말미라 회사를 그만두고 아버지 간병을 시작하기로 했다.

그리고 첫날 담당의는 아버지가 손을 쓸 수 없는 상태이며 항생제로 겨우 하루하루를 보내고 계신다는 이야기를 하신다.

너무나 멀쩡해 보이는데 아버지가 생존해 계시는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들으니 기분이 묘하다.

연명 치료는 6~7단계로 나누어져 있는데 아버지에게 항생제 투여는 그 연명치료의 6단계인 셈이셨다.

항생제를 끊고 하루하루 숨을 조이며 아버지를 살폈다.

너무도 건강해 보이시지만 얼마 남지 않은 삶을 살고 계셨다.

항생제를 끊고도 1주일을 더 사셨다.

아버지의 마지막 새벽을 지키는 아들

이대로 좋아지면 다시 퇴원해서 산소호흡기라도 달고 더 사시는 건가 하는 의문이 마음을 스친다.

그리고 2주째(총 4주째)되는 화요일 아버지는 거친 숨을 쉬기 시작하셨다.

동생과 우리 가족은 아버지의 임종 전을 보기 위해 모였다.

잠시 침묵이 흐르고 다시 가족들은 병원을 나와 병원 1층 로비에 대기하고 있었다.

점점 산소 포화도 수치가 내려간다.

이제는 산소 탱크로 수명을 잡고 계시는 것이다.

내 부탁으로 간호사가 산소 수치를 최대로 하고 일단 지켜보기로 했다.

하지만 소용이 없는 일이라는 것은 나도 알고 있었다.

그리고 한 순간 아버지가 편안하게 주무시는 것을 보았다.

바이탈도 다 정상이고 맥박도 느리지만 뛰고 있었다.

간호사를 불러 아버지 상태를 봐 달라고 했다.

전번처럼 다시 일어나시는 줄 알았다.

간호사는 이런 일을 여러 번 겪은 것처럼 혈압을 재었고 혈압은 나오지 않았다.

내가 생각하는 죽음과는 다르게 아버지는 이미 돌아가셨다.

내가 마지막으로 본모습은 너무도 편안하게 곤히 주무시는 모습이었다.

레지던트가 내려와서 심전도 검사를 하고 사망 선고를 했다.

사망선고가 내려지고 병원 장례식장을 구하고 정신이 없이 3일이 지났다.

아버지와의 이별이 끝났다.

COMMENTS · PART 11

도시와 아버지 댓글 0

아직 댓글이 없습니다. 읽다가 궁금한 점이나 보탤 내용을 남겨 주세요.